평화로운 아침, 월레스는 오늘도 그로밋의 노력으로 아침을 평온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베스트 프랜드인 그로밋을 위해 월레스는 노봇Norbot, 아마 노움(Gnome)과 로봇(Robot)의 합성어겠죠? 을 만들어 줍니다. 정성스럽게 정원을 깍두기로 썰어대는 노봇이 맘에 안들지만 의외로 그런 깍둑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노봇을 통한 돈 벌이에 벌써부터 흐믓한 월레스. 하지만 그런 노봇에 비밀이 있으니...

정말 오랫만에 그들이 돌아왔다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추격전은 누가 뭐래도 월레스와 그로밋: 전자바지 소동에서의 기차 추격 장면일 것입니다. 말보다는 한번 보는 게 더 낫습니다.

작중에서 블루 다이아몬드를 훔치러 온 페더스 맥그로(펭귄)과 그로밋 윌리스는 하는 게 없 기차 추격전은 정말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페더스 맥그로는 이 장면 하나로 윌리스와 그로밋 시리즈에서 단 한 편만 나왔지만 가장 인상깊은 빌런이 되었죠. 그리고 그런 페더스 맥그로가 31년만에 돌아왔죠.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Wallace & Gromit: Vengeance Most Fowl는 16년만에 돌아온 월레스와 그로밋의 신작입니다. 넷플릭스에서 1월 초에 단독 공개했는데 저는 꽤 늦게 보게 되었습니다. 제 점수는요...

월레스와 그로밋은 왜 좋을까

1. 월레스와 그로밋

양털도둑에서는 창문닦이, 복수의 날개에서는 정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월레스는 원래 발명가입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지요. 월레스의 집에도 그가 만드는 다양한 발명품이 있고, 항상 월레스가 사고를 치는 이유도 그의 발명품이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죠. 월레스는 이야기에서 기(起)를 담당합니다.

그로밋은 천재견입니다. 도그와트 대학교 공대에서 '개들을 위한 공학'을 최고 득점으로 졸업한 공돌이죠. 플레잉 카드 쌓기도 잘하고, 비행기 조종도 할 줄 압니다. 그렇지만 항상 월레스를 최선으로 생각하고 위험에 빠진 월레스를 구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로밋은 이야기에서 전(轉)을 담당합니다.

월레스와 그로밋은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죠. 이게 이야기의 결(結) 입니다.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 대부분(양털도둑에서는 잠시 그로밋이 위기에 빠지고 월레스가 구해줍니다.) 이러한 구조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 이야기의 매력을 추가하는 게 바로 승(承)을 담당하는 악당이죠.

2. 페더스 맥그로

페더스 맥그로는 매력적인 악당입니다. 무표정한 얼굴과 대비되는 그의 맑은 눈은 페더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죠. 전작인 몽둥이를 치켜든 그로밋에게 총을 슥 내미는 와중에도 표정 변화가 없는 모습이나 이번 편에서 멀리서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그로밋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찐 악당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하지만 페더스 맥그로를 미워할 수만 없는 것은 그가 가진 매력 때문입니다. 긴장할 때 땀을 흘리는 모습이라던가, 동물원 의자에 앉아 하얀 물개를 쓰다듬는 모습에서 우리는 매력을 느끼죠. 그리고 전자바지 소동 마지막에 허무하게 잡히는(유리병에 그냥 쏙 하고 들어와버려서) 모습에서 느껴지는 허술함도 있구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 전반적으로 긴장이 넘치지만 그에 반해 우리는 너무나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습니다.

3. 놓치지 않는 블랙 유머

월레스와 그로밋에는 유머가 가득합니다. 페더스 맥그로가 갖힌 감옥이 동물원이라던가, 정원을 가꾸는 그로밋에게 선물해준 노봇은 정원을 깍둑썰기하거나, 연락이 쏟아져서 당황하는 머커지(여자 경찰)에게 전화기를 빼앗고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전화번호니~"를 시전하고 전화를 꺼버리는 매킨토시 경감과 같은 모습이 있죠.

하지만 그런 유머에 시니컬함이 숨어 있는 게 매력입니다. 동물원에 대해 동물을 가두는 곳으로 본다던가, 느리지만 정성을 다해 개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빠르고 일괄적인 것을 선호하는 모습,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공공 서비스에 대한 비꼼 등이 담겨있죠.

1 + 2 + 3 = "갓작"

이러한 세 가지 요소로 인해 저는 이번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한 지 로튼토마토 신선도 100%, 레터박스 평점 4.0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를 구독 중이라면 반드시 봐야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Behind the movie

1. 넷플릭스와의 네번째 협업, 두번째 단독 배급

디즈니 플러스가 2019년 런칭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압도적인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마블 스튜디오를 앞세운 디즈니 플러스는 매우 무서운 존재였습니다.2025년에 와서야 그냥 그렇구나 하는거죠 넷플릭스는 자신들의 라인업을 확대하기 위해 여러 곳과 제휴를 맺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드만 스튜디오죠.

2019년 숀더쉽 더 무비: 꼬마 외계인 룰라A Shaun the Sheep Movie: Farmageddon 를 시작으로 2021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에 노미네이트 된 로빈 로빈Robbin Robbin 을 공동 배급한 넷플릭스는 2023년 치킨 런: 너겟의 탄생Chicken Run: Dawn of the Nugget부터 단독 배급(=영화관 안가고 넷플릭스에서만 튼다)을 시작합니다. 물론 아카데미를 노리기 위해 미국 소규모 개봉 하는 건 안비밀 그리고 2025년 드디어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를 단독 공개하였죠.

2. 가볍게 보기 좋은 장편 애니메이션이지만 만드는 건 빡센

이번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이하 월레스와 그로밋)는 16년만에 나온 시리즈로 82분의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추세로는 상당히 짧죠. 듄: 파트 2는 166분2시간 45분, 같은 애니메이션 작품만 따져도 인사이드 아웃2가 96분, 모아나2가 100분이죠. 비슷한 스톱 모션 작품인 극장판 패트와 매트: 뚝딱뚝딱 대소동이 83분정도였지만, TV판 패트와 매트는 9시즌에 130편이나 나왔죠.(...)

왜 이렇게 짧고 오래 걸리는가. 클레이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죠(...) 제작사인 아드만 스튜디오가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애니메이터 1명이 일주일 작업했을 때 약 4초 분량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단순 계산으로 해볼까요?

40시간(1주일 근로시간)일 때 약 4초 = 10시간에 1초

82분 * 60초 = 4,920초 * 10시간 = 49,200시간 / 24시간 = 2,050일

2,050일 / 365일 = 5년 7개월 15일!!

3. 오마주의 향연

박찬욱은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죠.

영화 공부하실 때 요즘 영화만 보지 마시고 옛날 영화 많이 보시고 옛날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굉장히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에요.
예를 들어서 뭔가를 베끼고 싶을 때에도 존윅4 베꼈다, 그러면 도둑놈이라고 욕을 먹을 거에요. 그런데 나처럼 히치콕의 현기증을 베꼈다, 그러면 이건 뭔가 있어보이고 영화사의 어떤 계보 속에 위치하는 뭐 평론가들의 멋진 글도 받을 수 있고 여러모로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영화란 좋은 고전 영화를 잘 베껴오는 것이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잘 베껴오기"도 사실 쉬운 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잘 베껴오게 되면 그걸 우리는 오마주Homage라고 하는거죠. 그리고 원래 월레스와 그로밋은 좋은 오마주를 잘 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제가 찾아낸 오마주는 이정도입니다. 더 찾으신 분은 제보해주시고, 모르고 봐도 재미있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게 오마주니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케이프 피어(1962)

우리에게는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이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인 1991년작이 더 친숙하겠지만 다른 오마주 영화와 비교해본다면 이쪽이겠죠? 영화 초반부에 페더스 맥그로가 감옥(=동물원)에 갇혀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은 영화 케이프 피어에서 감옥 안에서 맥스 케이디가 샘 보든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의 오마주죠. 근데 네가 보물을 훔쳐서 들어간거잖아 페더스... 맥스 케이디도 강간폭행범이죠

저주받은 도시(1960)

애니메이션 보고 오면 뭔지 바로 알 겁니다.

007 위기일발(1963)

페더스가 의자에 앉아 하얀 물개를 쓰다듬는 이 장면은 007 시리즈에서 MI6에 대적하는 국제범죄조직인 스펙터의 수장인 에르스트 블로펠드를 오마주한 것이겠죠. 대부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여왕(1951)

후반에 나오는 보트 이름이 Accrington Queen인데 이건 영화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나오는 보트 African Queen의 오마주죠.

이탈리안 잡(1969)

이하 생략(...)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2023)

지난 월레스와 그로밋: 전자바지 소동에서도 미션 임파서블의 유명한 장면을 오마주했었죠. 이번 편에서는 미션 임파서블의 가장 최신 시리즈인 데드 레코닝에서 오마주한 장면이 많네요. 전반부가 케이프 피어라면 후반부는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